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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은 '도산 안창호의 날'…캘리포니아 첫 외국인 기념일

캘리포니아주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일을 공식 채택했다. 가주 의회는 올해부터 매년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Dosan Ahn Chang Ho Day)'로 제정하고 한인사회 발전을 기원한다. 29일 가주 하원 최석호·섀런 쿼크 실바 의원실은 전날 상원에서 도산 안창호의 날(Dosan Ahn Chang Ho Day) 결의안(ACR269)을 찬성 39(1명 불출석), 만장일치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4일 하원 역시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가주에서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일이 제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1월 9일은 도산 선생의 탄생일이다. 의회는 결의안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내와 해외에서 모두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애국지사 중 한 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1878년 태어난 그는 한국인들에게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또한 도산 선생이 10대부터 서울의 미션스쿨에 다니며 조국의 현대적 교육을 꿈꾸고,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초창기 한인 이민들의 미주 정착을 이끈 사실을 소개했다. 결의안은 "도산의 리더십은 미국 사회, 특히 가주에서 한인커뮤니티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도산 선생은 1902년 10월 7일 시애틀,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1926년 3월까지 총 3차례 미국을 왕래하며 초기 한인사회 결속과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미국에 거주한 12년 동안 미 전역을 누비며 한인사회 결속에 나섰다. 그는 리버사이드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 건설, 항일독립운동단체 겸 한인사회 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조직(1909년),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 등 한인사회 단합과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현재 리버사이드 도심에는 도산 동상이 세워져 있다. LA 한인타운 내 도산 안창호 우체국, LA 다운타운 10번과 110번 프리웨이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도 유명하다. 도산 안창호의 날 결의안은 최석호·섀런 쿼크 실바 하원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최 의원은 "미국에서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한인동포 권익을 위해 활동한 한국인을 기념하는 날을 제정한 일은 큰 의미"라며 "11월 9일 도산 안창호의 날 우리 후세대에게 무엇을 교육할지 한인사회가 고민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8-08-29

가주 11월 9일은 ‘도산 안창호의 날’

캘리포니아주(가주)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일을 공식 채택했다. 가주 의회는 매년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제정하고 한인사회 발전을 기원한다. 29일 가주 하원 최석호·섀런 쿼크 실바 의원실은 전날 상원에서 도산 안창호의 날(Dosan Ahn Chang Ho Day) 결의안(ACR269)을 찬성 39명, 만장일치(1명 불출석)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한인 이민초기 선구자 역할을 한 도산 안창호 선생 탄생일을 가주 정부 공식 기념일로 기리게 됐다. 가주 하원은 지난 14일 도산 안창호의 날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의회는 결의안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내와 해외에서 모두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애국지사 중 한 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1878년 태어난 그는 한국인들에게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또한 도산 선생이 10대부터 서울의 미션스쿨에 다니며 조국의 현대적 교육을 꿈꾸고,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초창기 한인 이민들의 미주 정착을 이끈 사실을 소개했다. 결의안은 "도산의 리더십은 미국 사회, 특히 가주에서 한인커뮤니티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kim.ian@koreadaily.com

2018-08-29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주하원서 만장일치 채택

캘리포니아주 의회 하원이 '도산 안창호의 날' 결의안과 8·15 광복절 73주년 축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가주 상원이 도산 안창호의 날 결의안을 채택하면 가주에 첫 외국인 기념일이 제정된다. 최석호·섀런 쿼크 실바 하원의원실에 따르면 가주 하원은 13일 도산 안창호의 날 결의안(ACR269)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원 의원들은 두 의원이 공동발의한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취지에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결의안은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생이 태어난 11월 9일을 명시했다. 상원은 곧 하원을 통과한 결의안 표결에 나선다. 해당 결의안은 제리 브라운 주지사 서명이 필요 없다. 결의안은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운동에 앞장선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약상을 담았다. 실제 안창호 선생은 1902년 10월 7일 시애틀,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1926년 3월까지 총 3차례 미국을 왕래하며 초기 한인사회 결속과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거주한 기간은 총 12년이다. 그는 리버사이드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 건설, 항일독립운동단체 겸 한인사회 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조직,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 등 한인사회 단합과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8-08-13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결의안 표결에 부친다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에 한 발 더 다가섰다 . 의회가 안창호의 날을 제정하면 미국 국적이 아닌 첫 외국인의 업적을 기리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전망이다. 7일 최석호 하원의원과 섀런 쿼크 실바 하원의원에 따르면 하원은 오는 13일 새크라멘토 주청사에서 '안창호의 날(Dosan Ahn Chang Ho Day)' 결의안(ACR269)을 표결한다. 아울러 8.15 광복절 결의문도 다룬다. 안창호의 날은 최 의원과 실바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6일 하원에 상정했다. 최 의원 측은 "대한민국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날 결의안을 통해 한인사회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결의안은 안창호 선생의 활약상을 담았다. 안창호 선생은 1902년 10월 7일 시애틀,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1926년 3월까지 총 3차례 미국을 왕래하며 초기 한인사회 결속과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미국에 거주한 12년 동안 미 전역을 누비며 한인사회 결속에 나섰다. 그는 리버사이트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 건설, 항일독립운동단체 겸 한인사회 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조직,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 등 한인사회 단합과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안창호 선생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이를 반영하듯 리버사이드 도심에는 도산 동상이 세워져 있다. LA 한인타운 내 도산 안창호 우체국, LA 다운타운 10번과 110번 프리웨이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도 유명하다. 하원이 도산 안창호의 날을 결의하면 뒤이어 상원도 결의안 표결에 나선다. 결의안은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생이 태어난 11월 9일을 명시했다. 다만 상.하원이 외국 국적인 특정 인물을 기념하는 결의안을 채택할지는 미지수다. 하원이 결의안을 채택해도 상원 표결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의 날 상.하원 결의안 채택을 위해서는 도산의 미주 활약상을 더 자세히 알려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장태환 UC리버사이드 교수는 "안창호 선생은 한인이민 초기 언행일치 리더십을 보이며 한인 권익과 한인사회 발전에 헌신한 분"이라며 "한인이민 초기 노동자와 동고동락을 하며 최초 한인촌을 세우고, 민주주의 정신으로 한인이 참여하는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을 주류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kim.ian@koreadaily.com

2018-08-09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청신호…가주하원서 13일 결의안 채택

캘리포니아주 의회의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가주 의회가 도산 선생의 날을 제정하면 미국 국적이 아닌 외국인의 업적을 기리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7일 가주 하원 최석호 의원(68지구)과 섀런 쿼크 실바 의원(65지구)실에 따르면 하원은 13일 새크라멘토 주 청사에서 도산 안창호의 날(Dosan Ahn Chang Ho Day) 결의안(ACR269)을 표결한다. 아울러 8·15 광복절 결의문도 다룬다. 도산 안창호의 날은 최 의원과 실바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6일 하원에 상정했다. 최석호 의원 측은 "대한민국의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날 결의안을 통해 한인사회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자 한다"고 결의안 취지를 밝혔다. 해당 결의안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약상을 담았다. 안창호 선생은 1902년 10월 7일 시애틀,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1926년 3월까지 총 3차례 미국을 왕래하며 초기 한인사회 결속과 조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미국에 거주한 12년 동안 도산 선생은 미 전역을 누비며 한인사회 결속에 나섰다. 그는 리버사이트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 건설, 항일독립운동단체 겸 한인사회 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조직,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 등 한인사회 단합과 발전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가주는 안창호 선생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이를 반영하듯 리버사이드 도심에는 도산 동상이 세워져 있다. LA한인타운 내 도산 안창호 우체국, LA다운타운 10번과 110번 프리웨이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도 유명하다. 가주 하원이 도산 안창호의 날을 결의하면, 뒤이어 상원도 결의안 표결에 나선다. 결의안은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생이 태어난 11월 9일을 명시했다. 다만 가주 상·하원이 외국 국적인 특정 인물을 기념하는 결의안을 채택할지는 미지수다. 하원이 결의안을 채택해도 상원 표결을 거쳐야 한다. 도산 안창호의 날 상·하원 결의안 채택을 위해서는 도산의 미주 활약상을 더 자세히 알려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장태환 UC리버사이드 교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인이민 초기 언행일치 리더십을 보이며 한인 권익과 한인사회 발전에 헌신한 분"이라며 "도산 선생은 한인이민 초기 노동자와 동고동락을 하며 최초 한인촌을 세웠다. 민주주의 정신으로 한인이 참여하는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했고,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선 사실을 주류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 문화재청은 7일(한국시간) 도산 안창호 일기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8-08-07

"8월 13일 새크라멘토로 오세요" 가주의회, 도산 안창호의 날·광복절 결의문 채택

"역사적인 주의회 결의문 채택의 기쁨을 함께 나눕시다." 가주의회가 내달 13일(월) 도산 안창호의 날(11월 9일) 선포 결의안(ACR 269)과 한국의 광복절(8월 15일) 기념 결의안(HR 120)을 채택할 예정이다. 두 결의안을 상정할 최석호(공화.사진) 가주 68지구 하원의원은 19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탄생일인 11월 9일을 가주의회가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하고 기념하게 된다"라며 "동시에 한국의 광복절을 기념하는 결의문도 함께 채택한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이어 "도산 안창호의 날은 올해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매년 가주의 기념일로 지정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의원은 한인사회에 큰 의미를 지닌 두 결의문이 채택되는 순간을 많은 한인이 지켜보고 축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달 13일 새크라멘토 주의회장을 방문할 이들을 모집하고 있다. 최 의원은 "한인 커뮤니팅의 지도자들과 언론매체 관계자 역사적 순간을 함께할 한인의 참여를 환영한다. 인원은 선착순 50명으로 제한한다"고 말했다. 참가를 원하는 이는 내달 13일 오후 12시30분까지 가주 청사(1315 10th St.)로 집결하면 된다. L 스트리트와 11th St에서 내리면 편리하다. 공항에서 주청사까지는 차량으로 30분 거리다. 귀가는 오후 5시 이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제반 경비는 참석자가 부담해야 한다. 참가 신청은 내달 7일 오후 4시까지 에스더 고(949-939-9899) 최 의원 보좌관에게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18-07-19

"도산노인 대학 졸업했습니다"

도산노인대학(총장 조상문)은 지난달 27일 오후 2시 김동수 인랜드 한인회장과 가족, 친지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인회관에서 제3기 졸업식을 가졌다. 김동수 회장은 축사에서 "도산 선생의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으로 행하면 못 이룰 게 없다"며 "졸업생들의 학업 열의에 경의를 표하고 그동안 조상문 총장과 강사들의 열정적인 봉사에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조상문 총장은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대학은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특히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졸업장을 전달하게되어 기쁘고 어떠한 졸업장보다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로마린다 한국인 교회 오충환 목사는 "친구 목사에게 당신은 평생 한 사람만 구원해도 도리를 다한 것이라고 전한 적이 있다"며 "교육 과정 중에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무언가 한 가지라도 이뤘다면 그만큼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졸업생을 축하했다. 이날 김동수 회장과 조상문 총장은 20명의 졸업장을 일일이 전달했다. 주요 수상자는 ▶개근상: 강흥권, 장경자, 장수자, 노재상, 제시카 박, 박영남, 박치호, 강신구, 이중애, 강환숙, 안미경, 이영선 ▶우정상: 박치호, ▶봉사상: 송삼섭, 안미경, 노재상 ▶격려상: 이종근 등이다. 이들에게는 상장과 엘렌 G 화이트의 저서 '생애의 빛' 1권씩이 전달됐다. 또한 한인회관 관리에 수고한 노재상 이사에게 감사장과 장학금 1000달러를 수여했다. 황인국 객원기자

2018-07-04

"시니어 교육강좌 들으러 오세요" 인랜드 도산노인대학 개강

제3기 인랜드 도산노인대학(총장 조상문ㆍ부총장 문창길 목사) 개강식이 지난 11일 노인회관(9295 Magnolia Ave #106, Riverside)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김동수 한인회장은 "도산노인대학은 인랜드 지역에 사시는 시니어들의 다양한 취미생활을 돕고 노인층에 맞는 의료, 사회학, 생활 영어, 역사, 성경공부 등 다양한 교육 강좌를 제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인사했다. 조상문 총장은 "도산 노인대학은 60세 이상 모든 노년층이 대상이며 각계 각층의 유명 강사들을 초청한 만큼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제3기 강의 일정과 강사진을 소개했다. 개강 당일 강사로 나선 로마린다 SDA교회 오충환 목사는 "가나안 땅 과연 거기가 유토피아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다른 강사들로는 미주 평통 리버사이드 분회장 김성우(미국생활영어 1, 2), 이상철 목사(시 문학), 웃음 치료 전문가 손상언 장로(웃음치료), 해외 한민족 대표자협의회 남문기 의장(미주 동포의 삶과 꿈), 전 로마린다 의대 차철준 교수(뇌졸중 혈전증 예방법), 라시에라대학교 윤원길 교수(사회학, 인문학), 로마린다 SDA교회 전현욱 목사(컴퓨터,스마트폰,태블릿 사용법), 최근 북한을 다녀온 YTN 방송의 유대식 대표(북한은 지금) 등이 나올 예정이다. 강의는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 종강식은 오는 6월 27일이다. ▶문의: 조상문 총장 (909)228-8120

2018-04-18

'도산 안창호 우체국' 명칭 존속키로

LA한인타운에 있는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입주 건물 개발 계획에 따라 곧 이전할 예정이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23일 LA 총영사관에 따르면 김완중 총영사는 전날 영사관을 찾은 니나 하치지안 LA시 국제관계 담당 부시장을 면담하고 존속이 불투명했던 도산 안창호 우체국 명칭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데 대해 사의를 표시했다. LA 한인타운 6가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은 지난 2004년 연방의회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도산 선생의 생애와 공로를 기려 명명한 기관이다. 서부지역에서 독립유공자 이름을 따서 명명된 연방 기관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우체국이 입주한 건물이 2016년 매각되고 최근 고층 주상복합건물로 신축하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우체국 존속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해당 건물에 호텔이 입주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체국의 입지가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LA 한인사회와 한인단체, 총영사관 등이 LA 시와 시의회, 연방기관 등을 상대로 도산 안창호 우체국 명칭 존속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김완중 총영사는 지난달 하치지안 부시장을 만나 LA 시 차원에서 당국과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우정국은 지난 7일 공청회를 열어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더라도 명칭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우정국은 새로운 우체국 입지를 한인타운 주변에서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지난달 캘리포니아주 하원 섀런 쿼크 실바 의원과 최석호 의원이 발의한 2차대전·한국전쟁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 기념 하이웨이 지정 결의안은 현재 심의 중이다. 한인사회는 김영옥 대령 이름을 딴 하이웨이 구간 지정 결의안도 통과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2018-03-23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김순학은 지방회서 헌신하다 마차 사고로 별세

말이 뛰쳐나가 마차서 떨어져 숨져 같이탔던 박충섭 가족은 중상당해 장례식에 한인·미국인 50여명 참석 친구 밀러는 문상객들 호텔로 초청 아들 김태선은 암으로 28세 사망 동포들 애절한 심정으로 죽음 애도 ◆김순학의 죽음 김순학은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이 파차파 애비뉴에서 바인 스트리트로 이동했던 1918년 말에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쇠퇴하던 무렵에도 김순학은 리버사이드에서 활동했다. 1918년 당시 리버사이드에서 실업에 종사했던 사람은 허승원, 김인수, 김순학, 박충섭이다. 김순학은 리버사이드에서 30에이커 토지에 감자 농사를 지었다. 단독 경영은 아니고 2인 합자였으며, 자본이 2600원이었다. 이때 리버사이드는 재정 부족액이 8원 65전이었다. 또한 김순학이 1919년에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현지 신문 기사도 발굴 되었다. 리버사이드 지역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 1919년 2월 24일 보도에서 "한국인 김순학이 어제 마차 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어 김순학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버사이드 디렉터리'에서 1914부터 1917년까지 김순학이 글렌우드 미션 인 호텔에서 베이커로 일했다는 새로운 정보도 확인했다. 그는 마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이 호텔에서 근무했다. 지역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Press Enterprise)' 2월 26일 기사에 "한인 장로교회에서 있었던 김순학의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광고도 실려 있다. '신한민보'는 김순학의 마차 사고에 대해 보다 자세히 보도했다. 1919년 2월 27일자 기사는 "김순학 씨 비명횡사.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져 즉각 사망. 리버사이드 지방에서 리운경.송종익 양 씨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23일 오후 4시 그곳에 거류하는 김순학 씨는 박충섭 씨의 가족과 함께 마차를 타고 농장에 나가다가 중도에서 마차에 매인 말이 부지중에 총알 같이 달아나는 바람에 마차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모두 떨어질 때 김순학 씨는 두골이 깨어져 곧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입원시켜 의사의 수술을 받았으나 마침내 차도를 얻지 못하고 그날 오후 6시1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튿날 10시 30분에 에버그린 매장지에 안장하였다더라." 또한 같은 지면에서 "박충섭 씨 가족은 중상. 그 마차에서 떨어지는 때에 박충섭 씨와 그 부인과 자녀가 다 중상하였으나 위태한 지경은 면하였고 다만 박 부인은 잉태한 지 6, 7달이 된 가운데 마차에서 떨어질 때에 크게 놀랐고 조금 상처를 입어 마음과 신체가 강건치 못함으로 지금 그곳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는 중인데 수일 후면 차도를 얻어 퇴원할 듯하다더라"고 보도했다. 박충섭씨 부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다가 김순학씨는 사망하고 박충섭씨 가족은 중상을 입은 것이다. 또한 '신한민보' 1919년 3월 6일자 기사는 "고 김순학 씨의 장례. 호상자 내외국인 46 명. 리버사이드에 다년 머물던 김순학 씨의 별세의 보도는 이미 기재되었거니와 지난 25일 오전 10시에 그 장례식을 그곳의 윔 암쓰테즈 교당에서 거행하였다. LA.업랜드.클리몬트 등지에서 호상으로 온 손님이 19인이오, 서양 손님이 14인이오, 본 지방 동포 13인과 더불어 46명이 호상하였다. 장례식은 민찬호 목사가 주장하여 슬픈 기도와 영결의 노래를 마친 후에 내외국인의 슬픈 눈물로 에버그린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후에 고 김씨의 제일 믿는 서양 친구 밀러 씨는 모든 손님을 '그린웃' 여관으로 청하여 오찬을 대접하였더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밀러씨는 당시 김순학 씨가 일했던 글렌우드 미션 인(Glenwood Mission Inn) 호텔 주인이다. 그가 동양인 종업원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문상객을 모두 호텔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김순학씨의 인품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되었을 때 임시 회장을 역임했고 한인 장로 선교회 목사로도 활동한 김순학은 글렌우드 미션 인에서 일하면서 신임을 많이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순학의 아들 김태선 김태선(Joseph Kim)의 묘비에는 한글로 김티션의 묘사진을 확인해보니 '김티션'이것을 현대어로 읽으면 '김태션'이나 '김태선'이다. 김태선에 관한 새로운 신문 기사도 발굴되었다. 김태선은 현지 신문인 '프레스 엔터프라이즈(Press Enterprise)' 1915년 11월 23일에 자신이 주방장으로 일하고 싶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25년 11월 24일에는 그가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와 함께 1925년 11월 27일에는 장례식이 거행됐다는 보도도 발견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김순학과 김태선은 부자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1925년 12월 3일 '신한민보'는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태선 씨는 '캔서'로 불행 별세. 리버사이드에 거류하던 고 김순학 씨의 장남 김태선 씨는 불행히 '캔서'라는 중병을 얻어 그곳의 공립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였었으나 마침내 백약이 무효하여 24일 오후 12시에 별세하여 같은 달 27일 오후 2시 반에 그곳의 공동 매장지에 안장하였다. 김 씨는 금년이 28세 된 아주 젊은 청년 학생으로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황천의 나그네가 된 고로 당지에 거류 동포들은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뿌린다더라. 리버사이드 통신" 이로부터 김순학과 김순학의 장남인 김태선이 부자 사이이며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도 밝혀진 것이다. 1918년에 김태선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아버지 김순학과 함께 의무금을 납부하였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7일 "국민의무금. …김순학 5원, 김태선 2원 50전…"으로 나타난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 "창립기념절 각 지방,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류 남녀 동포 23인이 당일 식장에 출석하여 동 지방회장 구정섭 씨 주례하에 좌와 같은 예식을 순서로 거행하였다더라. 1. 개회…주석 구정섭, 2. 국가…일동, 3. 취지…주석, 4. 창가…아이들, 5. 축사…리운경, 6. 사현금…최재덕, 7. 축사…(누구나), 8.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김순학, 9. 창가 …김태선, 10. 애국가…일동, 11. 삼호만세, 12. 폐식 다과 (리운경 씨 축사는 폭원이 없어서 생략함)"이라고 보도하였는데, 창립기념절 예식에서 아버지 김순학이 강연하고 아들 김태선이 노래를 불렀다.

2018-03-18

“도산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

“시대에 발맞추어 가치도 변화하는 법이다. 하지만 도산이 추구하던 가치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권리, 평등, 민주주의, 교육의 중요성, 시민의식과 같은 것은 현 시대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한국학교와 사회정의교육재단이 주최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 필립 커디씨 초청 강연이 지난 10일 성황리에 개최됐다. 샌프란시스코 성 마이클 한국인 천주교회에서 열린 이 강연회에는 초등학생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참석했다. 강연자 필립 커디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로 안창호 선생의 3남 2녀중 셋째이자 장녀인 안수산 여사의 장남이다. 이 날 필립 커디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으로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펼쳤던 항일 독립운동의 이야기와 함께 도산이 전하고자 했던 가치가 현 세대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커디씨는 “도산은 강력한 리더이자 섬기는 리더였다. 그는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 이민노동자들을 조직해 고된 환경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으며 이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강연이 끝난 이후에는 청중들과 대화의 시간도 이어졌다. 커디 씨는 “강연을 다니다보면 한국인보다 도산의 철학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알고 공감하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말도 있지 않은가. 현 세대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현재 국제적인 이슈로 제기되는 위안부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나갈 것을 당부했다. 이 날 강연에 참여한 송재규(47)씨는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음은 애국선열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됬다. 뜻깊은 강연이었다”며 소감을 전했다. 허문희 인턴기자

2018-03-12

동포 자본 결집해 도산과 함께 회사 창업

김인수-김용련-김삼손 3대 거주 같은 초등 다니고 같은 묘지 묻혀 집 비운 도산 위해 가족에 큰 도움 나중에 중가주 델라노서 농장 운영 김인수 가족 김인수는 안창호 부인 안혜련(이혜련)의 외오촌숙(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저씨뻘 되는 사람)으로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활동하며 파차파 캠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오래 거주했다. 1905년에는 리버사이드에서 지방회장을 역임했는데 그때 안창호를 맞이하는 행사를 열었다. 주로 오렌지 노동주선사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동포들의 자본을 결집하여 경제활동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또한 참외 농사나 감자 농사 등 실업활동에 활발히 하였다. 김인수에게는 장남 김용련과 차남 김용찬, 장녀 김돌리, 차녀 김노라가 있다. 1913년 이후 김인수가 농업 경영을 위해 타처로 이거하였으나 자녀들은 리버사이드에 남아서 학교를 다녔다. 차남 김용찬은 1925년, 둘째 딸 김노라는 1935년에 사망하였다. 김인수는 말년에 다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기도 했는데 리버사이드는 그의 본거지였다. 맏아들 김용련 역시 가족을 이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였다. 1912년 김인수가 실업활동으로 타처로 이거했을 때 리버사이드를 지켰다. 오렌지 노동 주선일을 하였고 남아 있는 가족을 교육시켰다. 김용련의 부인은 김헤이즐이고, 자녀들로는 김삼손, 김맬리, 김조니, 김루시, 김바이올렛이 있다. 김인수의 자녀인 김돌리와 김용련의 자녀들인 김삼손, 김맬리, 김루시가 리버사이드 한글학교를 같이 다녔다. 김용련의 3녀인 바이올렛은 교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했고 지금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고 있다. 김용련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존 김만 결혼했다고 랠프 안이 알려 주었다. 리버사이드 시의 또 다른 묘지인 올리브우드 묘지에서는 헤이즐 김(Hazel Kim, 1889~1978)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말리(Mallie M Kim), 조니(Johnny Kim), 루시(Lucy R Kim), 바이올렛(Violet C Kim)의 어머니이다. 말리는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영N.(Young N. Kim, 1889~1954)의 묘지도 있다. 그는 김용련이다. 에버그린과 올리브우드 묘지에서 한인 6명의 묘지를 발굴했으며 그들이 모두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인수의 가족은 디렉토리 명단에 따르면, 김닌수(Kim Nin Soo) 아래에 샘 김(Sam Kim), 돌리 김(Dollie Kim), 체스터 Y. 김(Chester Y Kim)이 있다. 김닌수는 김인수이다. 샘 김은 김인수의 손자이자, 김용련의 아들이다. 신한민보에는 김삼손으로 나타난다. 돌리 김(Dollie Kim)은 김달리 또는 김딸리라는 김인수의 맏딸이다. 체스터 Y. 김(Chester Y Kim)은 김돌리의 남편 김정일이다. 김돌리와 김정일은 1926년에 결혼하였다. 이 결혼식은 신부 김돌리의 친정인 김인수의 샌타애나 사택에서 이뤄졌다. 체스터 김과 돌리 김 사이에 아들 도널드 한명이 있다. 김인수와 관련된 최초의 기사는 1905년 공립신보이다. 리버사이드에서 귤따기 노동을 주선하는 김염수는 김인수일 수 있다. '공립신보' 1905년 12월 6일 "적귤방당. 전호에도 말하였거니와 리버사이드에 지금 귤따기를 시작되었는데 공가는 매일에 1원 17전씩이오 그곳에 있는 김염수 씨가 귤 딸 사람 백명을 모집하는 중이라더라." 당시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이 호황을 맞아 백명의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인수는 1905년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리버사이드 거주한 후 1909년 타지역으로 이주했다가 1910년 다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돌아와서 초기 한인타운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아들 김용련도 초기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설립 및 운영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인수의 첫째 아들 김용련은 1906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활동하였는데 '공립신보' 1906년 12월 22일 '하변회 보고'에서 리버사이드지방회 사찰로 나타난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한국에서 신민회 활동을 하고 자주 타지역을 순방하여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돌볼지 못했을 때 이혜련의 삼촌 김인수는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막내 아들 랠프는 증언해 주었다. 김인수는 그후 중가주의 델라노(Delano)로 이주하여 큰 농장을 운영했다. <23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2-18

"도산 멘토 삼아 차세대 육성" 흥사단OC지부 창립총회

도산 정신을 실천하는 흥사단이 OC에 지부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흥사단 미주위원부(위원장 윤창희, 이하 위원부)는 지난 27일 가든그로브 OC한인회 회관에서 OC지부 창립총회 및 입단식을 열고 서경원 미주위원부 수석부위원장을 초대 OC지부장으로 선임했다. 이 밖에 선임된 임원진은 ▶부지부장 김형중 ▶총무 박상준 ▶감사 장형국 등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서경원 OC지부장 및 임원진 임명식과 함께 신입회원인 예비단우 7명(박상준, 서지혜, 송경호, 신종범, 임광조, 정찬열, 한규한씨)이 통상단우 7명(안재훈, 주정세, 장형국, 김재동, 이창수, 김형중, 서경원씨)을 포함한 회원들의 환영 속에 입단했다. 이로써 OC지부는 총 22명의 회원이 활동하게 됐다. 지난 2003년 흥사단에 입단한 서경원 OC지부장은 "도산을 멘토로 삼고 이민사회를 이끌어 갈 차세대 지도자 발굴 육성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한국 흥사단 아카데미식의 저명인사 강연회를 비롯해 청소년들 봉사기회도 제공하겠다. 또한 인격수양, 심신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단우 배가 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지난 1979년 주재원으로 도미한 서 OC지부장은 남가주기독청년연합회 회장, OC기독실업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가든그로브 소재 자동차딜러 퍼시픽 자동차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OC지부는 내달 3일 임원회의를 개최한 후 매달 둘째 토요일 정오에 가든그로브 OC한인회 회관(9888 Garden Grove Blvd.)에서 월례모임을 가질 계획이다. 또한 흥사단 활동에 관심있는 한인이나 흥사단 활동 경험이 있는 단우들을 모집하고 있다. 흥사단에 입단하게 되면 1년간 예비단우를 거친 후 통상단우로 활동할 수 있게 되며 1회성 가입비 30달러에 연회비는 250달러다. 문의는 전화(714-553-9234)로 하면 된다. 한편 OC지부는 이날 즉석 모금을 통해 김종대 OC한인회장에게 종합회관 건축기금 500달러를 전달했다. 박낙희 기자 park.naki@koreadaily.com

2018-01-29

"요주의 인물로 찍힌 도산은 이민국 감시 받아"

대질 심문 받았지만 체류 연장 허락 최종 판단 하지 않고 출국까지 파악 귀국선 소노마호 기관고장으로 회항 환송행사 후 샌프란시스코 출발 맞아 1925년 7월22일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에게 체류 연장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1925년 8월16일부터 6개월간 체류가 연장되어 즉 1926년 2월16일까지 합법적 체류가 가능해진 것이다. 안창호는 1926년 3월 초에 하와이를 떠났는데 그것은 체류 기간이 넘었기 때문에 이민국이 1926년 3월 2일에 도산 안창호를 강제로 추방시킨 것이다. 안창호는 이민국에 체류 연장 허가를 해 준 것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 감사 편지는 흥사단 편지지에 1925년 8월6일자로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임시 커미셔너에게 보내졌다. "내가 신청한 임시 체류 연장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보여준 친절과 배려에 깊은 사의를 표명합니다. 아쉽게도 체류 연장 허락 편지가 늦게 도착해서 동부로 가려던 계획은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체류 연장 허가를 받은 후 활발한 활동을 지속했는데 '신한민보'는 지속적으로 안창호의 순방활동을 보도했다. '신한민보' 1925년 11월 12일에 '안도산 선생의 북가주 순행'이라는 제목으로 "안도산 선생은 현금 다뉴바와 태프트 등지에 있는 여러 동포들을 심방 중에 있다는데, 불일간에 상항에 도착할 듯하다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신한민보' 1926년 2월 4일자 기사에 '안도산 북방 동포 심방 중'이라는 제목으로 도산 안창호가 곧 원동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불일간에 원동으로 다시 갈 계획인 바 현금 북가주 몇몇 곳에 거류하는 동포를 심방하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26년 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안 도산은 태프트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으로 북가주 방문 소식을 알리고 있다. "도산 안창호 씨가 북방에 순행한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안창호)씨는 지난 토요일에 상항을 떠나 태프트에 있는 동포들을 심방한 후 나성 본택으로 회환할 예정이라더라." 안창호는 또한 시카고 심문 답변에서도 많은 곳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가서 약 2달 머물렀다. LA에서 스톡턴, 새크라멘토, 다뉴브, 리들리,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베이커스필드를 방문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카고로 향하던 중 덴버에 잠시 체류 후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 뉴욕, 코네티컷주의 뉴헤븐, 보스턴, 폴 리버스 (워싱턴 DC), 뉴저지의 패터슨, 다시 뉴욕에 갔다가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민국은 안창호에 대한 대질 심문과 조사를 실시하고 일단 안창호가 신청한 체류 연장을 허락했다. 그러나 안창호가 공산주의자 또는 볼셰비스트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한 상태로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가 미국 땅을 떠날 때까지 철저히 감시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앤젤 섬 이민국은 1926년 2월 6일 (12025/14120) 문서에서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문서에는 "안창호는 2월 23일 또는 24일 소노마호(S.S. Sonoma)로 떠날 예정인데 23일인지 24일인지 정확하지 않다. 안창호의 체류 기간은 1926년 2월 16일까지 인데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것을 꼭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안창호가 소노마호에 승선한 기록에는 필기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Continued journey on Sonoma to Australia"(소노마 호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계속 항해)"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의 사인과 문서 번호도 적혀 있다. 미국 이민국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노마 호에 탑승할 때 이미 안창호의 하와이 체류를 불허한 것이다. 1923년 2월23일 샌프란시스코 엔젤 섬 이민국 문서 (12025/14120)은 "안창호가 소노마호를 타고 떠난 것을 확인했다. 사진과 대조해서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 밑에 "1926년 3월2일 소노마로 떠났다. 그리고 이 배는 1926년 2월23일 고장 나서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안창호는 원래 하와이에 약 2주 체류하면서 동포들과 만난 후 상해로 갈 예정이었다. '신한민보'는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소식을 전했는데 '신한민보'는 1926년 2월 25일에 '안도산 송별회'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송별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1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왔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송별회를 상항 한인 예배당 안에서 22일 저녁에 개최하였는데 그 순서를 대략 소개하자면, 국민회 총회장 백일규 씨의 사회 하에 개회하고 애국가 1, 2절을 병창한 후에 사회자의 간단한 취지 설명이 있고 인하야 리대위 목사의 송별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여학도 하소정, 김코렌의 병창 창가가 끝나자 사회자의 소개로 정빈 안도산 선생이 등단하여 40분 동안 도도 수천 언의 간곡한 연설을 하야 청중 중에 감정이 연약한 남녀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연설의 상편을 필한 후에 황사선 씨의 독창 창가와 황보식 부인의 피아노 화창이 있은 후에 정빈이 연설을 다시 계속하야 약 40분 동안 열정의 권설이 있은 후에 '우리 다시 만날 때'라는 찬미 제 236장을 병창한 뒤에 정빈의 요청으로 애국가 3, 4절을 병창하고 임정구 목사의 기도로 폐회하다. 안도산의 연설 대지는 당신 스스로가 무슨 영웅이 되어서 우리 광복 사업을 하루 이틀에 성취하겠다고 담보는 할 수 없으나 우리 대한 혁명가 중의 한 분자의 자격을 가지고 우리 광복 사업을 위하야 최후의 일각까지 노력할 결심을 가지고 떠나시노라 하며 우리 일반에게 권고하신 말씀은 누구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모두 철저한 대한민국의 혁명가야 되자 하였다. 안도산이 기자에게 잠시 전하는 말씀에 의하면 '이번 떠날 때에 태푸트.산타애나.라성.스탁톤.상항 등지를 심방할 시에 사랑의 송별회와 접대와 또한 예물을 많이 받았는데 무엇으로써 보답할는지 참말 알 수 없다' 하더라. 그리고 떠나시며 나중 말씀이 재미 일반 동포들의 건강과 행복을 축사하노라고 하더라." 안도산은 2월 23일 소노마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출발하였다. 김형찬은 안도산이 남가주의 샌페드로 항을 떠나 배가 고장 나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했다고 밝혔으나 소노마 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가 고장 나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한민보'에서 송별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기 때문에 샌페드로 항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이 확인 되었고 또한 소노마 호 승선 기록 (1926년 3월2일)에 의하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926년 2월20일 탑승했다고 적혀 있다. <20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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